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종 독살설 (문단 편집) === 독살 긍정론 === 독살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삼과 음식을 제공해서 죽인 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 건 음식을 알맞게 먹지 못해서 죽었다고 해야 하지 독살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감과 게장의 조합이 독이 된다는 가설이 현대의학적으로 참이 아니라 하더라도, "당대에는 그것이 참된 내용이라고 인식되었던 이상" 두 음식을 올린 연잉군의 행위는 '''의심스럽다'''고 생각이 들기에 자연스럽다. 당장 [[희빈 장씨|경종의 친모]]만 하더라도,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의식을 벌였다는 이유로 사형당했다. 그러면 현대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그런 짓을 한다고 인현왕후의 신체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해서, 장희빈이 무죄가 되는가? 물론 현대법적으로는 아무리 잘해봐야 [[명예훼손]] 이상의 것이 성립하기 어렵겠으나, 적어도 당대에는 그런 의식이 저주를 불러온다는 인식이 있었고 장희빈이 이를 주도했다면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어불성설은 아니다. 현대의 형법으로도 [[미수범]]으로 다투어볼 여지가 있다. 마찬가지로 연잉군도 당대에 독으로 알려진 감과 게장의 조합을 경종에게 올렸다면, 잘 해봐야 "연잉군이 무식했다" 고 변호하는게 최선이다. 다만 독살설이 사실이 맞느냐는 주장과는 별개로, 위의 주장을 근거로 독살설을 부정하는 건 무리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세제 시절의 [[영조]]는 정말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다. 걸핏하면 역적 모의 명단에 자기 이름이 올라가는데, 당시 임금이 경종이어서 망정이지 다른 왕이었으면 금방이라도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비록 경종이 본인 생각이야 어쨌든 간에 죽을 당시까지 영조를 보호해준 덕에 죽는 일까지는 면했지만 당시의 영조로서는 참으로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결코 안심할 수 없는 가시방석 위에 앉아있는 상태였으며, 경종이 조금이라도 오래 살았다면 주변 소론 대신들의 부추김에 따라 마음을 바꿀 가능성 또한 상당하고 혹시나 경종이 자식을 갖게 된다면[* 불분명한 성기능 장애 문제를 빼고 나이만 보면, 경종이 자식을 가질 가능성은 상당히 높았다.] 역사적 전례에 비추어 볼 때 자기는 진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세조(조선)|세조]]만 하더라도 [[계유정난]] 직전까지만 해도 조정에서 가장 약소한 파벌을 이끌며 수세에 몰려있었고, 주변에 변변한 인물조차 없어 동네 건달을 부리는 상황이었다. 이런 세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본인이 잘 나서라기보단 [[김종서(조선)|김종서]]를 비롯한 당시 고명대신들이 수세에 몰린 세조의 상황을 근거로 낙관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당시 영조의 꼴이 세조랑 비슷한 처지인 셈. 또 공교롭게도 세조 역시 왕자 시절에 [[문종(조선)|문종]]이 동생이란 이유로 잘 보살펴준 사례가 있다. 다만 세조는 당시 후계자로 책봉된 것도 아니었고, 엄연히 조카인 [[단종(조선)|단종]]이 즉위해있었음에도 계유정난으로 뒤집어엎은 게 차이점이긴 하다.] 더군다나 비록 [[경종(조선)|경종]]의 보호로 목숨과 세제 자리는 지키고 있었지만 이는 반대로 말하면 경종이 마음만 먹으면 바로 연잉군을 제거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애초에 세제 책봉부터가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던 [[노론]]의 반강압적 압박에 경종이 사실상 굴복한 것이었고, 이에 빡친 경종이 얼마 안가 [[신임사화]]로 노론을 대거 숙청한 상태였기에 연잉군을 제거할 명분은 쌓이고 쌓인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래를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영조가 인간으로서 느낄 감정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인간은 매사에 계산적일 수는 없으며, 저렇게까지 수세에 몰리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존재다. 사건이 터지고 훗날 보기에는 "대체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일들도 많지만, 당장 본인이 현실에서 부닥치면 비슷하게 행동하는 패턴도 부지기수다. 그리고 당시 [[영조]]의 상황은 그저 몸 사리며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기보단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어차피 죽을 것인데 이판사판으로 질러도 충분한 상황이었다.[* 하다 못해 세조도 역모와 관련해서 이름이 오른 적은 없었고 계유정난 전까지는 최대한 몸을 사리며 지냈는데, 영조는 주변의 잘못에 더해 본인도 처신을 잘 못해서 잊을 만하면 이름이 등장하며, 경종이 사망할 당시에는 정말로 막다른 길에 내몰린 상태였다.] 동기가 충분하냐고 묻는다면 꽤나 충분한 셈이다. 게다가 경종을 살해하면서 영조에게 갈 이득이 없다는 주장은 사실 최소한 영조가 즉위하지 못할 때에나 먹힐 주장이지, 영조가 즉위를 성공한 마당에 먹힐 주장은 아니다. 경종의 죽음에 이어 즉위한 영조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노론]]과 더불어 조정을 장악하였다. 전세가 하루 아침에 역전된 것이다. 하다못해 경종이 생각을 바꿔서 말년의 [[선조(조선)|선조]]처럼 후계 문제를 두고 폐세제까진 아니어도 [[밀풍군]]이든,[* 이게 아주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건 후에 [[이인좌의 난]]을 통해서 드러난다. 경종이 좀 더 오래 살면서 [[소론]]의 부추김을 받거나 경종 본인이 [[신임사화]] 때처럼 분노하거나, 아니면 영조 측에서 뭔가 또 꼬투리가 잡히는 식으로 일이 틀어진다면 밀풍군을 옹립하는 일도 아주 불가능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말 그대로 죽을 위기에 놓인 채 가시밭길을 걷고 있던 영조로서는 이 또한 무시하진 못할 것이다.] 양자든 뭐라도 끼고 다른 말을 했다면 [[광해군]]이 당한 것처럼 영조도 큰 타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냥 멀리 갈 것도 없이 경종 본인이 바로 이런 이유로 노론으로부터 온갖 수모를 다 당했다.[* [[숙종(조선)|숙종]]이 죽기 전에 후계 문제를 흔들어버린 바람에 경종은 노론으로부터 왕으로 취급받지도 못했으며, 그 적수는 바로 세제인 영조였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할 틈도 없이 경종이 덜컥 사망하였으니 사실 [[영조]] 입장에서는 정말 좋은 타이밍이었다고 볼 여지도 충분한 것이다. 이러한데 경종이 죽음으로써 정말 영조에게 이익이 없다고 볼 수 있는지는 좀 더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즉위하고 얼마 안 가 영조는 그 정적인 [[소론]], 특히 준론을 향한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하였다. 물론 [[이인좌의 난]]을 비롯한 불미스러운 사건들도 더러 있었지만 [[이괄의 난]]처럼 파천을 한다든가 하는 일도 없이 모두 무난히 극복하였고, 괘서 사건이라든가 과거 시험장에서 당한 일 같은 건 확실히 [[영조]]의 기분을 망치는 데에는 충분할지언정 영조의 조정까지 망치는 것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영조는 조선 왕조 500년 중 무려 10분의 1인 52년을 집권한 왕이다. 정통성 문제로 어느 정도 시달린 건 사실이지만, 강한 왕권으로 장기간 통치한 영조인 만큼 '심각한 후폭풍을 각오하고' 했다고 하기에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소론이 비록 [[김일경]]으로 대표되는 준소와 [[이광좌]]로 대표되는 완소로 분열되었다고 하지만 진정한 완소는 당시 세제시강원 [[조현명]]과 [[조문명]] 형제, [[송인명]], [[박문수]] 등 극소수였다. 준소나 완소이나 경종이 죽으면 같이 몰락하고 노론이 득세할 거란 사실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었다. 더욱이 영조는 경종이 승하 당일까지 시약청을 설치하지 않은 점도 후에 큰 논란이 되었다. 경종이 병석에 오래 누워 있을수록 이에 위협을 느낀 준소가 세제를 폐하는 쿠테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당시 병권을 쥔 훈련대장 윤취상, 총융사 김중기, 어영대장 이삼은 모두 준소의 영수 [[김일경]]의 사람이었다.[* 이중에 처신을 잘해 살아남은 이삼을 제외하면 윤취상은 영조 즉위 후 김일경과 함께 주살당하고, 김중기는 이인좌의 난에 연루돼 처형된다.]세제가 왕위에 오르면 이들이 죽는다는 건 [[명약관화]]였다. 더구나 경종 임종시 김일경은 공교롭게도 왕세제 보호론을 주창한 이광덕의 논박을 받아 부신을 바치고 성 밖에서 대죄하고 있었다. 게장과 생감의 진어는 경종의 승하를 재촉하였고 결국 준소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지 않는데 성공한다. 또한 영조는 자신을 의학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하였다. 그런 영조가 생명이 위태로운 경종에게 의학적으로 해로운 음식을 먹이고 말았다. 의학에 조예가 있는 후계자가 위독한 왕에게 해로운 음식을 올린 건 의도와 무관하게 의심을 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